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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뉴스

일제강점기 전남 담양 대지주가 제주 관음사 불사 지원 계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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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4-11-16 17:51 조회2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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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의 네 번째 학술세미나가 오늘(16일) 제주시 테크노파크 세미나실에서 열린 가운데 봉려관스님이 관음사 창건 후 화재로 소실 된 관음사 재건에 힘쓴 국채웅 거사의 삶이 조명됐습니다.

이성수 동국대 겸임교수는 ’일제강점기 호남 부호 국채웅의 생애와 사회적 기여’에 대해 발표하며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담양지역의 대표적인 유력 인사 국채웅은 개인의 성공을 넘어 지역사회와 한국 불교 발전에 기여한 선구자적 인물”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국채웅에 대해 이 교수는 “1930년대 기준 그는 전라남도 개인 토지 소유자 중 8위를 차지했다”며 “또 1935년 자본금 20만원으로 우송농장을 설립해 경영하는 등 토지 소유, 기업 경영, 금융활동 등 대주지들이 자본을 산업으로 전환 과정 뿐아니라 여성 교육, 문화 정체성 유지 등에 기여한 인물”이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전남 담양의 대지주가 어떻게 제주의 관음사 불사를 지원하게 됐는지 설명했습니다.

이 교수는 “국채웅은 1년 4남을 두었는데 장녀 국추는 출가하여 성해(性海)라는 법명의 비구니 스님이 되었다”며 “성해 스님이 봉려관 스님 제자가 된 계기로 국채웅은 봉려관 스님과 제주불교를 적극 후원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관음사가 1939년 화재로 소실되자 1941년 봄 국채웅 거사는 성해스님에게 중건불사금과 도편수 등 목수 32명을 제주에 내려 보내 다시금 관음사를 재건하게 됩니다.

다만 국채웅 거사에 의해 재건됐던 관음사는 1949년 4.3당시 토벌대와 무장대의 격전지가 되면서 소실되는 아픔을 맞게 됩니다.

이어 민순의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 연구원은 ‘봉려관 스님과 대흥사의 교류-수계 인연과 대흥사의 포교를 중심으로’를 주제로 발표했습니다.

봉려관 스님은 대흥사에서 수계한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1907년 대흥사 산내 암자 청신암에 주석하던 비구니 유장 스님을 은사로 대흥사 청봉 봉성 화상을 계사로 수계를 받았습니다.

봉려관이라는 법명과 해월이라는 법호는 계사인 청봉 스님에게서 받았습니다.

민 연구원은 이 같은 자료를 통해 “봉려관 스님은 제주에서 관음신앙을 수행하는데 제주 지역 토착 종교가 공격받게 되자 전남 대흥사를 찾아가 그곳에서 수계를 받고 승려로서 기초적인 교양을 받는 등 제주도의 대중 교화를 위해 본토 불교의 정통성으로 힘을 얻을 수 있었다”며 봉려관 스님과 대흥사 관계는 상호 보안적이며 호혜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민 연구원은 “대흥사는 봉려관 스님을 대흥사의 포교사로 임명해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봉려관 스님의 대중 교화의 가피 속에 대흥사 기풍이 펼쳐나가길 의도했다”고 강조했습니다.

혜달스님혜달스님

마지막 발표는 사단법인 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장 혜달스님이 한금순 박사의 ‘김석윤 창건주’ 설을 반박하며 ‘근대 제주불교의 왜곡상 고찰’이란 주제로 발표에 나섰습니다.

혜달 스님은 한금순 박사의 왜곡 3가지를 들었습니다. 첫째는 관음사 창건이 1908년이 아닌 1909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혜달 스님은 “한금순 박사는 1943년 ‘법화사 봉려관 비명’에 ‘1908년 봄’ 창건 나오는 사료 등을 통해 봉려관 스님이 관음사 창건 1908년으로 주장했으나 혜달스님은 이보다 앞선 ‘관음사 봉려관 비문’에 ‘기유년 봄에 한라산에 사찰을 창건했다’라며 그 보다 앞선 관음사 창건연대가 1909년”이라고 반박했습니다.

또 혜달 스님은 “봉려관 스님이 1908년 관음사 창건을 위해 화주에 나섰던 시기”라며 “스님은 1908년 봄 산천단에서 주석했고, 4월은 불상을 봉안하고 제를 봉행하던 시기여서 1908년 봄에 관음사를 창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두 번째로 김석윤이 관음사 창건주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1909년 관음사가 창건 당시는 김석윤 스님이 의병항쟁에 의한 대구형무소(1909년 3월 4일~7월 22일) 수감중이었기 때문에 관음사 창건에 끼어들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혜달 스님은 김석윤의 동생 김석익이 작성한 ‘망형석성도인행록’을 인용하며 “김석윤은 1924년 이전에 제주를 떠났으며 1933년 제주에 돌아오기 까지 강승산계 보천교와 강증산을 미륵불로 섬기는 미륵교 신봉자”라고 불교도가 아니라는 주장까지 폈습니다.

세 번째로 혜달 스님은 1908년 김석윤을 운대사로 조작한 것은 비구니 봉려관 스님을 모욕한 것이라고 쓴소리를 쏟아냈습니다. 

그러면서 스님은 “광복 전후 자료들에는 운대사가 누구라는 기록자체가 없다”면서 “한금순이 김석윤을 운대사라고 주장하는 ‘제주도 아미산 봉려관의 기적’에 의하면 노승이 봉려관에게 가사를 전하고 홀연히 물러갔다고 하는데 김석윤은 당시 만 31세로 노승이 아닌 미륵교 신봉자”라고 운대사가 김석윤임을 부인했습니다.

스님은 마지막에 “근대 제주불교 역사가 사실의 역사로 제자리 할 때까지 필자는 후속 작업은 계속 진행하겠다”는 뜻을 비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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